원불교의 길을 묻다. 1
원불교의 길을 묻다.
개교 100년을 앞두고 원불교가 이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으로 나아갈 향방을 이 시대에 묻는 <원불교의 길을 묻다>에 우리시대 정론지인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의 두 종교 전문기자의 글을 싣습니다.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부적 역량강화에 집중하라.
도재기 | 경향신문 문화부차장
원기100년을 앞두고 원불교는 새 출발을 하려한다. 특히 교화·교세 확장을 위한 다양한 기획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교세확장 노력은 당연하지만, 단 성장제일주의는 크게 경계했으면 한다. 현재 정체추세인 개신교·불교가 안팎에서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의 하나가 외형적 성장제일주의이다.
점잖고 조용하다는 이미지는 적극적이지 않다는 의미
“참, 점잖죠!” “원불교도 큰일을 하네요?” 최근 원불교와 관련된 경험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어쩌면 원불교가 밖에 어떻게 비치는지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얼마 전 스님 두 분, 신부님, 목사님과 저녁자리를 함께했다(종교기자는 각 종교의 성직자 등을 하루에도 몇 분씩 만난다. 그러다보니 신부·목사님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합장으로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들 연배도 비슷한데다 친분도 있어 거리낌 없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원불교에 관해 오간 말들의 공통적 이미지를 요약하면 “점잖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발언에도, 포교에도, 평소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만나더라도 원불교 사람들은 ‘조용하고’ ‘차분하고’ ‘순진하다’는 내용이다.
또 ‘스타 성직자가 없다’ ‘적극적이지 않다’는 말도 있었다. 이는 지난 4월 익산과 영광 등 원불교 성지를 취재 차 순례하면서 직접 느끼기도 한 것이다.
또 다른 경험이다.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젊은 교무들이 4대강 공사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남한강변에서 기도회를 봉행했다. 교무들의 이 같은 결정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기사를 썼다. 일반 독자들의 반응이 꽤 많았다.
솔직히 원불교 관련 기사를 쓴 것 중 가장 많았고, 또 뜨거웠다. 부정적 견해도 있었지만 “원불교도 큰 일하네요?” 등의 격려 의견이 많았다. 행간에 긍정적 정서가 내비쳤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원불교는 4대 종단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당당하게 민족종교·토종종교의 대표 격이다.
4대 종단에 자리에 매김 된 원불교, 민족종교의 대표 격
이 같은 위상은 최근의 종교관련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조계종 ‘불교무설연구소’의 ‘2010년 정치·행정 지도자 종교의식조사’ 결과를 보자. 우리 사회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응답자들은 ‘사회적 영향력이 큰 종교’로 원불교를 4번째(0.2%)로 꼽았다. 개신교가 49.1%로 가장 높고, 불교(27.5%), 천주교(15.9%) 순이다. 개신교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해 말 조사한 ‘2009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결과도 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종교’ ‘향후 희망하는 종교’에서 원불교를 역시 4번째로 들었다. 원불교 관계자들은 이 결과를 보며 많이 서운해 할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더 깊이하고, 교화에 힘쓸 각오도 다질 수 있다.
말씀은 없고 경영만 있어서는 곤란
원기100년을 앞두고 원불교는 새 출발을 하려한다. 특히 교화·교세 확장을 위한 다양한 기획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교세확장 노력은 당연하지만, 단 성장제일주의
는 크게 경계했으면 한다. 현재 정체추세인 개신교·불교가 안팎에서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의 하나가 외형적 성장제일주의이다. 특히 교회의 경우 교회 안에 ‘말씀(신
실한 영성)은 없고, 경영(교회운영)만 있다’는 지적이다.
원불교는 교세확장의 개념을 타 종교와 다르게 잡아 외형적 성장보다는, 내부적 역량강화를 다지는데 집중했으면 좋겠다. 교당 안에 일원대도 진리의 ‘가르침’은 없는데, 신도 수 몇 만 명·교단 몇 천개 등 외형적 규모만 크다고 과연 교세가 큰 것일까. 각 종교의 신자수를 합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 수 만 명이나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교세확장의 기준을 교도 개개인의 공부 정도, 신실성에 무게를 뒀으면 한다. 가장 좋은 교화·포교는 “믿어라”가 아니라 “믿도록” 모범적인 언행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원불교 교도는 저렇게 괜찮은 사람들이구나.’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교화의 효과는 무궁무진하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 교화는 저절로
지금까지 잘 해오지 않았는가. 욕심을 부리거나, 조급하지 않았으면 싶다.
안 그래도 세상은 급하게 돌아가며, 너무 욕심이 넘친다. 원불교인 모두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 저절로 돋보일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2000년,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700여년이다. 대각한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불교의 문을 세상으로 크게 열어젖힌 것이 1916년이니, 송구하지만 이제 100년이다. 향후 수 천만 년 영속할 텐데 ‘이제’ 100년일 뿐이다. 원불교 누구를 만나더라도 청정한 법 기운이 우러나오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주세교단(主世敎團)이란 성업을 이룩하는 원동력이라 본다.
가난하고 뒤처진 약자들을 보듬어 안는 사회통합역할 중요
종교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을 넘어 사회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소외받고 가난하고 뒤처진 약자들을 보듬어 안는 사회통합 역할이다. 원불교도 전국에 모두 100여개가 넘는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여론 조사에서도 ‘사회봉사 활동을 적극 수행하고 있고, 또 잘하고 있는 종교’에 개신교-가톨릭-불교 다음으로 꼽혔다.
사회봉사 활동이 다른 대형 종단보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마음을 다한다면 결국 도드라질 것으로 믿는다. 교육 사업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직업 때문인지 필자는 종교의 사회비판 기능을 중요시한다. 한 사회에서 종교인만큼 도덕적 우위를 지닌 사람들도 드물다. 그만큼 권력의 부정부패, 사회의 불의나 타락,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시대의 중요한 가치 등에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발언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리에 비춰 하는 발언은 정치참여 아닌 종교적 행위 사회적 발언 부분에서 원불교는 비교적 소극적이라는 이미지다. 교단 지도자들은 대 사회적 발언으로 인한 교단의 상처를 염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이 두려워 종교인의 양심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교단 밖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동력을 빼는 것이지 싶다.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정말 큰 이슈에 대해선 어깨에 힘을 좀 주고, 적극 적으로 발언했으면 한다.
교리에 따라, 교리에 비춰 하는 발언은 정치참여가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 행위이다. 원불교가 지향·강조하는 가치들이 훼손될 때,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침해당할 때는 가차 없이 원음을 울려야 한다. 그것이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 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개교의 정신을, 원불교의 존재를 세상에 드높이는 일이라 생각한다.[끝]
******원불교가 지향·강조하는 가치들이 훼손될 때,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이 침해당할 때는
가차 없이 원음을 울려야 한다.
그것이 원불교의 존재를 세상에 드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